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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사

한락연(韓樂然)

미술 큐레이터 2024. 11. 18. 21:35

 

출생지 중국 길림성 용정촌
출생-사망 1898년 - 1947년 7월 30일

 

개요
한락연은 일제 강점기에 활동했으며, 해방 이후 중국의 첫 조선족 출신 화가이다. 사회운동가 ∙ 정치인으로도 활동하였다. 상해미술전과학교에서 신미술 교육을 받았으며, 1931년 파리로 유학하여 후기인상주의 등 서양 미술사조를 접했다. 중국으로 돌아와 실크로드 근방의 소수민족의 민속과 풍속을 후기인상주의 기법으로 그리고, 돈황석굴벽화를 유화로 모사하는 등 독특한 회화적 발자취를 남겼다.

• 본명 : 한락연(韓樂然), 한광우• 활동분야 : 20세기 한국화• 시대 : 근대~한국 현대• 주요작품  - 경마준비(1945)  - 과일과 요구르트를 파는 쿠처여인들(1946)  - 과일바치는 비천 – 돈황석굴벽화모사도(1946)  - 과일바치는 비천 – 돈황석굴벽화모사도(1946)  - 당비천(돈황모가오쿠원126호벽화모사도)(1946)  - 능격본생과 인연고사(커쯔얼석굴제38호벽화모사도)(1946)  - 란저우황허의 물장수(1947)

생애
한락연(韓樂然)은 중국의 첫 조선족 출신 화가이다. 원래 이름은 한광우이다. 1930년에 전조선 학생작품 전람회에 입상하며 동아일보 지면에 등장한 적이 있다. 그러나 그 후 한국 근대회화사에서 전혀 언급되지 않다가 1990년대 초반 한중 수교가 이루어지자 국내에서 조선족 출신 화가를 조명하며 주목받았다. 또한 2005년에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 분관에서 ‘광복 60주년 기념 중국 조선족 화가 한락연 특별전’을 개최함으로써 중국 조선족 미술인으로는 국내에 가장 많이 알려진 작가이기도 하다. 반면, 중국에서는 80년대부터 한락연의 삶과 회화를 연구하려는 사람이 적극적으로 활동하여 1988년에는 최초로 그의 유작전이 북경에서 개최되기도 하였다.

한락연은 1898년 중국 길림성 연길현 용정촌에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그림 그리기를 좋아하였다고 한다. 9세에 용정 관립학교에 입학하여 졸업한 뒤 용정전화국과 용정해관 사무원으로 취직하였다. 1919년 가을에는 러시아 연해주로 유학을 떠났다. 같은 해 한국에서는 3 ∙ 1운동이 일어났는데 한락연은 고향 용정에서 일어난 항일시위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 그 과정에서 민족주의 항일 독립운동의 한계성을 인식하고 진보적인 사회주의자들과 접촉하기 위해 상해에 진출하였다. 다음 해 가을에 중국 상해로 건너와 류하이쑤(劉海粟)가 설립한 상해미술전과학교(현 상해미술전문학교)에 입학하여 정규 신미술 교육을 받았다. 1922년 상해에서 쑨원(孫文)과 만날 기회가 있어 사회운동가로서 많은 자극을 받기도 했다.

1923년에 중국공산당에 가입하였는데, 다음 해에 상해미술전과학교를 졸업하고는 중국공산당에 의해서 심양(沈陽)으로 파견되었다. 이때 이름을 한락연이라 고치고 화가로 활동하면서 미술전과학교를 설립하였다. 1925년 7월 말에는 하얼빈으로 파견되어 보육학교에서 가르쳤다가 1928년에 상해로 돌아왔다. 그 뒤 당 조직이 깨지자 프랑스로 유학을 떠나 1931년에 파리미술학원에 입학하였다. 공부를 마친 다음에는 네덜란드, 스위스, 영국, 이탈리아 등을 돌아다니면서 각국의 화풍을 익혔다. 유학하며 창수훙(常書鴻)과 교유하였는데, 그는 한락연과 유학 시기가 겹치고 귀국 후의 활동도 비슷하다.

1937년에 중국으로 돌아와 무한(武漢)과 중경(重慶)에서 ‘동북항일구국총회’을 조직하고 적극적으로 활동하였다. 그는 항일운동 잡지인 ‘반공반월간’(反攻半月刊)에 표지 그림을 그리고 유화로 선전 그림을 제작하여 항일 언론 활동을 하였다.
1940년 봄에는 섬서성 보계(寶鷄)에서 국민당에 체포되어 3년 동안 옥고를 치르기도 하였다. 1943년에서 1947년에는 난주(蘭州)와 서안(西安)에서 20차례의 미술전람회를 열었다. 1944년 한락연은 가족과 함께 실크로드로 통하는 난주로 이사하였다. 그 이듬해 티베트를 여행하며 인물화 중심의 민속 풍물을 화폭에 담았다. 1945년 가을부터 벽화 모사 작업을 본격적으로 시작하였다. 1946년 4월부터는 신강(新绛)에서 고대 고창국(高昌國) 유적지와 키질(Kizil) 천불동(千佛洞) 발굴 정리 사업을 처음으로 진행하였다. 하지만 1947년 7월 30일에 비행기를 타고 적화에서 난주로 가다가 조난 사고를 당하여 세상을 떠났다. 2010년 9월 22일에 중국 용정시 정부에서 용정 토성포의 육도하와 해란강 합수 지점에 락연공원을 세워 공적을 기리고 있다.

작품 활동
한낙연은 1931년 파리로 유학하여 국립 루브르 예술학원에 등록하였다. 그는 그 당시 화풍인 후기인상주의를 섭렵하고 사실 표현의 기초 위에 광선과 색채에 관심을 두었다. 이와 같은 화풍은 지금 남아있는 유화 작품에 잘 반영되어 있다. 특히 인물 표현에 인상파적 특징이 잘 드러나 있어 주목된다. 1937년 귀국 직후 항일 언론 활동을 하며 유화로 거폭(巨幅)의 선전 그림을 제작한 것은 유학 시절 풍경과 인물에 치우쳤던 사실과 큰 대조를 이루며, 노신(魯迅)의 사회주의 활동과 연관된다고도 볼 수 있다.

1940년 전후 국민당의 정치적 약점일 수도 있는 ‘대중의 빈한한 생활’ 묘사를 국민당으로부터 제한을 받았다. 그러나 그는 제자에게 ‘대중 속으로 파고들 것’을 그림의 본질로 가르쳤던 점을 생각하면 그의 회화 미학과 역사관을 한층 더 깊게 인식하게 된다. 그의 작품 ‘경마준비’(1945)나 ‘과일과 요구르트를 파는 쿠처여인들’(1946)은 소시민의 일상 풍경을 사실적으로 표현했다. 인물의 형태는 단순화되어 광선이 닿았을 때의 효과에 더욱 치중한 것으로 보인다.

1943년 이후부터 실크로드 소수민족의 민속 주제와 석굴 벽화를 모사하는 작업에 전념해서 확고한 역사의식을 보인다. 1945년 창수훙과 파리에서 헤어진 후 10여 년 만에 돈황에서 다시 났다. 그는 한락연의 실크로드를 사생한 그림을 보면서 매 폭마다 “빛과 색이 명쾌하여 화면이 생경하지 않고 수채화 기법의 세련미를 갖추고 있다”라고 극찬하였다. 이러한 특성이 드러나는 작품은 ‘과일 바치는 비천’과 ‘당비천’, ‘능격본생과 인연고사’(이상 1946) 등이 있다. 이처럼 대부분의 유작은 1945년에서 1946년까지 일 년여간의 전성기 시절 작품인데 화풍으로 보면 사실주의 기초 위에 색과 광선 표현에 치중한 파리 시절의 화법을 내보이면서도 완숙하게 다듬어진 정련미(整練美)를 더하고 있어 주목된다. 특히 수채화에서의 과감한 생략적 표현이 돋보인다. 한편, 한락연이 돈황을 방문해서 그린 유화모사도가 벽화를 대상으로 한 유일한 유화 그림에 해당한다. 따라서 한락연 이외에 아무도 벽화를 유화로 모사한 일이 없기 때문에 이것들은 벽화연구에 도움이 되는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말년에 제작한 작품에는 유럽에서 체득한 화풍이 잘 반영되어 있다. 실크로드의 풍물을 그린 작품에서 유화와 수채화를 막론하고 후기인상파적인 특징이 잘 드러나 있다. 특히 광선의 효과와 명암 처리를 강조하는 기법을 활용했다. ‘란저우 황허의 물장수’(1947)에는 난주를 지나는 황하(黃河)에서 발을 담근 채 물을 긷는 사람들의 모습을 그렸다. 분홍빛으로 물든 수면에 비친 사람들의 그림자 표현 등에서 후기인상파적 특징을 알 수 있다.

평가
국내에서 한낙연에 대한 연구는 매우 미미한 편이며 연구논문은 매우 드물다. 1990년대 초반 조선족 작가들의 전시가 활발할 당시 미술 잡지에 윤병모가 소개한 글과 한중 수교 직후 1993년에 개최된 ‘한락연 유작전’을 계기로 권영필이 쓴 글이 있을 뿐이다. 그러나 조선족 출신인 한낙연이 실크로드 제반 소수민족의 생활상, 풍습, 민속 따위를 화폭에 담았고, 당시에는 접하기 어려운 오지에 있던 실크로드 벽화를 모사 대상으로 삼은 점은 특별한 의미가 있다. 이것은 중국 현대회화사에서 초유의 일로서 새로운 장르를 개척했다고 할 수 있다. 그의 회화 경향은 그 이후에 실크로드를 주제로 다룬 황저우(黃冑)와 같은 화가들에게 자극을 주었다. 따라서 한락연은 오늘날 국내 화단과 중국 화단에 있어서 새롭게 평가되어야 할 중요한 작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