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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김대중 대통령의 탄생 100주년, 서거 15주기를 맞아 그의 육성으로 작성된 마지막 자서전 『김대중 육성 회고록』을 출간한다. 1924년 신안 하의도에서 출생했을 때부터 2009년 서거하기 전까지 김대중 대통령의 생애와 사상을 생생한 육성으로 들을 수 있다.
“인생은 아름답고 역사는 발전한다”는 마지막 일기를 남긴 위대한 정치가이자 정치사상가인 김대중은 역사의 퇴행을 온몸으로 이겨냈다. 일제강점기, 남북분단, 6·25 전쟁, 군사독재, 민주화운동, 국가 번영을 체험하고 선도한 인간 김대중의 회고를 통해 격동하는 한국 현대사, 참으로 엄혹했지만 찬란하게 빛나는 그 현장을 우리는 이 책으로 생생하게 체험할 수 있다.
목차
후세대들이 찾는 살아 숨 쉬는 기록물 | 김대중 육성 회고록을 펴내면서
1. 나의 고향 하의도와 목포
2. 혼돈과 역경의 시간들
3. 시련 속에서 꽃피운 의정활동
4. 민주세력의 리더로 떠오르다
5. 유신독재에 맞서다
6. 서울의 봄부터 13대 대선
7. 13대 국회부터 15대 대통령 당선
8. 한국경제의 위기 극복과 새로운 도약
9. 민주인권대통령
10. 한반도 평화프로세스의 시작
11. 최초의 남북 정상회담과 한반도외교
12. 후배 정치인들에게 드리고 싶은 말
감사의 말씀 | 김홍업・김성재
한국 정치의 나침반이자 항해도 | 류상영・장신기・박명림
김대중 대통령 연보
김대중 대통령 육성 연설 QR코드 목록
김대중 대통령의 탄생 100주년, 서거 15주기를 맞아 그의 육성으로 작성된 마지막 자서전 『김대중 육성 회고록』을 출간한다. 1924년 신안 하의도에서 출생했을 때부터 2009년 서거하기 전까지 김대중 대통령의 생애와 사상을 생생한 육성으로 들을 수 있다.
“인생은 아름답고 역사는 발전한다”는 마지막 일기를 남긴 위대한 정치가이자 정치사상가인 김대중은 역사의 퇴행을 온몸으로 이겨냈다. 일제강점기, 남북분단, 6·25 전쟁, 군사독재, 민주화운동, 국가 번영을 체험하고 선도한 인간 김대중의 회고를 통해 격동하는 한국 현대사, 참으로 엄혹했지만 찬란하게 빛나는 그 현장을 우리는 이 책으로 생생하게 체험할 수 있다.
『김대중 육성 회고록』은 김대중 전문 연구자들과의 인터뷰 형식으로 된 유일한 자전적 성찰이자 기록이다. 김대중 대통령은 연세대학교 김대중도서관 연구진들과 2006년 7월부터 2007년 10월까지 41회 42시간 26분의 구술 인터뷰를 진행했고 그 결실이 바로 『김대중 육성 회고록』이다.
이 책에는 김대중 대통령만이 증언할 수 있는 경이로운 인간 실록이자 한 탁월한 정치지도자가 겪은 역사 풍경이 담겨 있다. 소년기와 청년기, 해방 전후와 6·25 전쟁을 겪으면서 시대와 사회를 통찰하는 그의 생각과 신념이 어떻게 형성되었는지 다룬다.
자유당과 이승만의 독재 시절, 4·19 혁명을 겪으면서 정치에 나서고, 박정희 쿠데타와 유신 선포 속에서 죽음을 딛고 민주화운동에 헌신한다. 다시 전두환 신군부의 등장과 수난받는 민중의 역사 속에서, 결코 좌절하지 않고 분연히 일어서는 큰 정치인 김대중의 행로는 참으로 경이롭다.
그러나 투옥과 망명을 통해 정치인 김대중의 정치 사상은 찬란하게 성장한다. 감옥에서의 높은 수준의 독서, 망명과 유학을 통한 세계적 지성과의 교류와 토론은 그를 세계적인 정치지도자로 일으켜 세운다. 5번의 죽을 고비와 6년에 걸친 투옥, 3년여의 망명생활과 장기간의 가택연금 등을 통해 세계평화와 인권에 대한 확고한 이론과 사상으로 무장한다. 한반도와 세계평화를 어떻게 구현할 것인가를 체득하게 된다.
김대중은 참으로 험난한 생애를 살았다. 이 책은 알려지지 않은 이야기를 대거 담고 있다. 민주주의와 정의의 길을 걷는 김대중의 삶은 참으로 놀랍다. 그의 삶과 이론과 성찰이야말로 세계인들에게 민주주의를 위한 교과서가 되기에 충분하다.
유학 시절 스티븐 호킹과 이웃일 때 찍었던 사진 등 김대중도서관이 미공개한 사진 10여 장을 포함한 64장의 역사적 사진이 실려 있다. 김대중 대통령의 육성이 담긴 QR코드를 넣어 김대중 대통령의 음성을 언제든 들을 수 있는 것도 이 책의 큰 장점이다.
『김대중 육성 회고록』은 철저하게 준비하는 큰 정치가의 소명의식과 더불어 ‘서생적 문제의식’과 ‘상인적 현실감각’으로 한 시대를 이끄는 지도자의 전략과 사상을 읽게 한다. 불의에 단연코 저항하면서 펼쳐내는 그의 정치역정은 같은 시대를 사는 동시대인들에겐 감동이고 축제 같은 것이다. 그는 사형선고를 내리는 신군부의 온갖 유혹을 뿌리친다. 지지를 보내는 국민을 결코 배신하지 않는다.
분단된 조국의 통일을 위한 평화전략과 평화정신은 국제적인 감동을 불러일으킨다. 결국 세계의 양심은 그에게 노벨평화상을 수여한다. 한반도 평화를 구현하는 전략의 일환으로 역사상 최초의 남북 정상회담을 성사시킨다.
『김대중 육성 회고록』은 특히 분단시대를 살아가는 이 땅의 청년들에게는 ‘민주주의를 구현하는 교과서’가 되기에 충분하다. 오늘의 혼탁한 한국 정치상황에서 『김대중 육성 회고록』은 새로운 정치를 발전시키는 나침반이자 항해도가 될 수 있다. 『김대중 육성 회고록』에는 김대중의 정치적 리더십과 평화정책, 인권정책, 복지정책에 대한 그의 사상과 전략이 살아 숨쉬고 있다. 이를 통해서 얻을 수 있는 그의 정치적 지혜와 전략전술 그리고 국정운영 철학과 실천은 오늘날의 어두운 정치현실을 타개해나갈 수 있는 길잡이가 될 것이다.
■ 일제강점기부터 해방까지,
하의도와 목포에서 얻은 정신적 자산
“내가 나의 과거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은 이번이 마지막일 것입니다. 그래서 나도 질문지를 받으면 꼼꼼하게 살펴보고 내 기억을 되살리기 위해서 사전에 철저하게 준비했습니다.”
『김대중 육성 회고록』은 김대중 대통령이 하의도에서 태어났을 때부터 어린 시절과 젊은 날에 대해 증언한 내용을 자세히 담고 있다. 김대중 대통령이 태어난 당시 하의도는 농지 대부분이 기존 지주들의 탐욕에 의해서 결국 일본인들에게 소유권이 넘어간 상태였고 농민들이 소유권을 주장하며 소작쟁의를 일으켰던 곳이었다. 저항 정신이 있는 지역에서 김대중 대통령의 아버지는 마을의 구장이었다. 덕분에 『매일신보』가 집으로 배달되었고 김대중 대통령은 정치면을 열심히 읽는 어린 시절을 보냈다.
하의도에서 보통학교를 다니던 김대중 대통령은 공부를 위해 목포로 이사했다. 일제강점기 목포는 7대 도시에 들어갈 정도로 큰 규모의 항구도시였다. 목포공립상업학교에 수석으로 입학한 김대중 대통령은 웅변에 소질을 보였다. 2학년 담임 무쿠모토 선생님은 “김대중의 웅변은 일본 대의사가 의사당에서 한 것에 못지않다”며 칭찬했다. 졸업 이후 목포 전남기선에서 일하다 해운 사업을 했다. 경제활동이 활발하게 이루어지던 상업도시에서 김대중 대통령은 해운회사와 『목포일보』를 경영하면서 경제의 흐름을 배우고, 회계를 비롯한 각종 경제 지식까지 깨우쳤다. 이때의 경험은 국회의원이 된 후 정책 수립과 예산 심의를 하는 데 밑거름이 되었다.
해방 직후 ‘일본 천황이 항복했다’는 내용의 글을 써서 거리에 붙이고 다녔던 것, 목포공립상업학교에서 철수 전의 일본군과 학생들이 충돌했을 때 소방차를 타고 가서 중재했던 것, 1946년 대구 10·1 사건 때 목포 지역 정치적 라이벌의 무고로 구금당했던 것 등 다양한 젊은 시절 일화가 등장한다.
사업 대금을 받으러 서울에 올라갔다가 6·25 전쟁이 발발한 것도 빼놓을 수 없다. 김대중 대통령은 한강을 건넌 후 여러 죽을 고비를 넘기며 걸어서 목포까지 내려갔다. 생환 이후 사업을 계속하던 김대중 대통령은 1952년 부산정치파동을 보며 그동안 가지고 있던 정치에 대한 관심과 문제의식을 키우기로 결심했다. 무소속으로 3대 총선에 출마했던 김대중 대통령은 본격적으로 정치에 투신하기 위해 서울로 올라온 후 민주당에 입당해 소장 정치인으로서 활동했다.
■ 인권과 평등, 사람을 위한 민주주의
『김대중 육성 회고록』에서 김대중 대통령은 중요한 순간마다 어떤 신념으로 행동했는지를 회고한다. 이 책에서 볼 수 있는 김대중 대통령의 면모는 지극히 자유민주주의자다. 자유, 평화통일, 민주주의, 인권을 위해 투신하고 가혹한 탄압을 받아왔던 것이 그의 일생이었다. 김대중 대통령은 민주당 입당 후 출마한 1958년 총선에서 불법적으로 후보등록을 취소당했고, 1961년 국회의원 첫 당선 3일 후 5·16 쿠데타가 발생해 선서도 하기 전에 의원직을 박탈당했다. 박정희 정권의 독재에 저항하면서 지도자로 성장한 그는 1969년에는 3선개헌을 막기 위해 시민사회 세력과 함께 반대투쟁에 나선다. 당시 효창운동장에서 했던 연설은 “15분 연설 도중 박수가 20번 가까이 나올 정도로 아주 큰 호응”을 얻었다.
“경제개발의 성과를 소수가 독점하다 보니 노동자와 농민은 희생되고 중산층 형성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았어요. 이렇게 되면 민주주의도 제대로 발전하기 힘듭니다.”
1963년 6대 국회의원이 된 김대중 대통령은 활발한 의정활동으로 박정희 정권에 타격을 줬다. “대통령 권한대행과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인 박정희 씨의 공화당 입당은 위헌이고 국회법 위반이기 때문에 대통령에 당선된다고 해도 무효가 된다”는 사실을 밝혀 논란을 일으켰다. 그때부터 박정희 정권의 본격적인 경계를 받기 시작했다고 김대중 대통령은 회고한다.
김대중 대통령은 대변인·선전부장 등을 역임하며 독재를 통한 경제발전을 비판하고, 진정한 경제발전을 위해서는 민주주의가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또한 박정희 대통령의 성과라고 인정받는 경부고속도로 건설 등도 “지금 우리나라에서 나타나는 여러 가지 문제점이 이때의 불균형 발전에 기인”한다고 평가한다. 이때부터 김대중 대통령이 주장한 것은 지방자치제다. 부정선거를 막고, 국민들의 민주주의 의식을 높이며, 야당의 조직력을 강화하기 위해서는 지방자치 선거가 반드시 필요하다고 주장했고 1990년에는 13일간의 단식투쟁까지 하면서 지방자치 실시를 관철시켰다.
“역사를 길게 보면 결국 국민을 위해서 헌신한 사람이 패배한 경우는 없습니다. 일시적으로 패배할 수는 있지만 역사는 바른 길로 진전합니다.”
김대중 대통령은 대한민국 민주주의에 위협이 찾아왔을 때마다 온몸을 던져 투쟁했다. 두 번의 망명과 평생 6년여의 감옥 생활을 했다. 첫 번째 망명은 1972년 10월유신이 선포되었을 때 일본에서 다리 부상을 치료하던 중 국내 소식을 듣고 귀국하지 않고 일본에 남아서 투쟁하기로 결심하면서 시작되었다. “미국과 일본에서 한국 민주화에 대한 여론을 형성”하고, “해외 민주세력을 일깨우”겠다는 목표를 세웠다. 『김대중 육성 회고록』에는 그때 일본에서 중앙정보부에 의해 납치살해를 당할 뻔했던 때의 증언을 생생히 담고 있다.
구사일생으로 국내에 귀환한 후에도 김대중 대통령은 투쟁을 멈추지 않았다. 침체되어 있는 유신독재 반대투쟁을 다시 일으키기 위해 “감옥에 갈 각오를 하고” 3·1 민주구국선언을 발표했다. 이 일로 진주교도소에 수감된다. 이 사건이 국제적인 관심사가 되자 부담을 느낀 유신 정권은 김대중 대통령을 치료한다는 명목으로 서울대학교 감옥병실로 이감시켰지만, 회고에 의하면 김대중 대통령은 그곳에서 “창문을 모두 폐쇄해서 밖을 볼 수 없었고 햇빛을 쬘 수 없었다”는 “지옥을 체험”했다.
전두환 정권 때에도 김대중 대통령의 투쟁은 계속됐다. 신군부는 5·17 비상계엄 확대조치와 함께 내란음모 조작사건을 일으켜 김대중을 연행했다. 이때 김대중은 광주민주화운동에서 광주시민이 100명 넘게 사망했다는 소식을 듣고 충격을 받아 쓰러지기도 했다. 전두환 정권이 협력하지 않으면 살려두지 않겠다고 했을 때 “죽음이 두렵다고 해서 광주에서 죽은 수많은 시민을 배신할 수 없다고 판단”해서 “죽겠다고 결심”하고 사형선고를 받았으나 국제적인 구명운동으로 목숨을 건졌다. 그후 청주교도소에서 수감생활을 하게 되었다.
두 번째 망명은 국제사회의 구명운동을 통해 1982년 형 집행정지를 받고 미국으로 떠난 것이었다. 이때도 “미국이 한국의 독재정치와 인권유린에 대해 비판하고 견제하”도록 만드는 것이 목표였다. 미국의 보수주의자들까지 만나 설득하며 미국 상하원의원들에게 큰 관심을 받았다. 그러다 1985년 2·12 총선을 앞두고 전두환 정권을 더욱 압박하기 위한 적극적인 투쟁을 하려고 목숨을 건 귀국을 단행했다.
“나는 민주화운동이 목표로 한 것은 자유·인권·평화가 뿌리내리고 확산되는 사회라고 생각합니다. 그런 면에서 인권은 민주주의 발전을 위해 필수적인 요소이자 가치입니다.”
김대중 대통령은 “인권 있는 민주주의”를 민주화의 본질이라고 인식했다. 인권보다 물질적 가치를 중시하는 한국사회를 변화시키기 위해 분투하는 모습을 이 책에서 확인할 수 있다. 특히 여성인권 신장을 위한 노력은 13대 국회의원 때부터 성과가 있었다. 1989년 가족법 개정을 위해 평민당 총재로서 책임지고 총력을 다했던 것이다. 당내 남성 의원들도 달가워하지 않는 문제였지만 다른 당 총재들과 노태우 대통령까지 설득하여 간신히 법안을 통과시켰다. 대통령이 된 후에는 대통령 직속 여성특별위원회를 설치하고 남녀차별금지법을 제정하는 등 노력을 이어갔다. 국가인권위원회를 출범시키고, 사상전향제를 폐지하고 양심수를 석방해 대한민국을 민주인권국가로 평가받게 했다.
■ 대한민국 최고의 국제공공재
‘김대중’의 평화외교
“전쟁은 인간의 최소한의 존엄도 지키지 못하게 하고 고귀한 생명도 무수히 빼앗아갑니다. 그래서 나는 전쟁을 막고 한반도의 평화적 통일을 이룩해야 한다는 확고한 신념을 갖게 된 것입니다.”
민주화를 위해 싸우다 투옥되고 납치되고 망명투쟁을 하는 등 김대중 대통령의 행보는 세계의 주목을 끌었다. 게다가 대통령 당선 후 국가부도 직전의 상황에서도 민주주의와 시장경제를 동시에 발전시켜 빠른 속도로 위기를 극복하고 세계적인 지식정보·문화강국으로 발돋움하는 것을 보며 세계는 경이로운 눈빛을 보냈다. 북한·일본과도 화해하며 미래지향적인 관계로 발전시키고, 한국인 최초로 노벨평화상을 수상하는 등 김대중 대통령을 통해 우리나라의 국격이 상승해 외교가 더욱 활성화되었다.
김대중 대통령의 평화외교는 세 가지 모습으로 나타났다. 첫째, 1971년 7대 대선 때부터 공약으로 내세웠던 ‘4대국 안전보장론’이다. “한반도의 지정학적 특성을 감안하면 남북한 사이의 민족문제를 해결하는 데에 있어서도 주변 4대국(미·일·중·소)과의 외교가 매우 중요”하다는 것이다. 그들이 최소한 평화통일을 방해하지 않도록, 최대한 협조적인 정책을 취하도록 하는 ‘협력적 자주’의 원칙을 세웠다. 그래서 김대중 대통령은 미국의 클린턴과 부시 대통령, 일본의 오부치 게이조 총리, 중국의 장쩌민 주석, 러시아의 보리스 옐친 대통령과 정상회담을 할 때 ‘경제위기 극복에 대한 협조’와 ‘대북 햇볕정책에 대한 지지’를 얻어내기 위해 노력했고 성공을 거두었다.
“그동안 반목과 대립을 해온 우리 민족이 스스로 문제해결을 위한 행동에 나서서 좋은 결과를 만들어낸 것은 역사적인 의미가 깊습니다.”
둘째, 김대중 대통령은 ‘3단계 통일론’에 따라 남북관계를 발전시켰다. 김대중 대통령은 분단 기간이 길어짐에 따라 남북한 사이에 이질감이 생겼기 때문에 즉각적인 통일이 아닌 단계적인 접근이 필요하다고 1971년부터 주장해왔다. 이에 따라 대통령 임기에는 3단계 중 1단계인 ‘남북연합 구성’을 이루려고 목표했다. 남북연합의 핵심은 각종 대화와 상호합의였기 때문에 남북 정상회담을 통해 합의를 이끌어내려고 했다. 『김대중 육성 회고록』은 분단 이후 최초로 남북 정상회담을 하고 6·15 공동선언을 발표하기까지 알려지지 않은 과정을 생생하게 밝힌다.
셋째, 김대중 대통령은 동남아와 동북아를 아우르는 동아시아 공동체를 구상했다. 1983년 필리핀의 야당 지도자 베그니노 아키노 의원과 ‘아시아민주전선’을 만들어 아시아 지역에서 반독재 민주화를 위한 공동투쟁에 나서기로 했지만 아키노의 암살로 이 계획은 실행되지 못했다. 김대중 대통령은 1998년에는 ASEAN+3 정상회의에 참석해서 ‘동아시아 비전그룹’을 만들자고 제안했다. 이를 시작으로 동아시아정상회의(EAS)까지 이어지는 등 동아시아 공동체 담론을 꾸준히 발전시켰다.
■ 미래를 준비한 대통령
“훌륭한 정치지도자가 되기 위해서 우선 필요한 것은 각종 정책에 대한 공부입니다. 공부하는 정치인이 되어야 그다음 단계로 발전할 수 있습니다.”
김대중 대통령은 오랜 공부와 연마를 통해 준비된 대통령으로 시대의 부름을 받았다. 『김대중 육성 회고록』을 보면, 그가 가장 적절한 시기에 최고의 쓰임을 받았던 이유가 일찍부터 미래를 준비했기 때문임을 알 수 있다. 국제관계, 경제, 첨단기술, 문화 등 미래사회를 전망하고 대비하는 통찰은 당대 최고 수준이었다. 그는 “특정 분야에서 최고 전문가가 되지는 못하더라도 전문가와 소통할 수 있는 수준의 지식을 갖추”는 것이 정치지도자가 갖춰야 할 자질이라고 강조한다.
첫째, 김대중 대통령은 세계화를 피할 수 없는 흐름으로 파악하고 외국자본 문제에 대비했다. “부존자원이 적고 국내시장 규모가 작기 때문에 세계시장에서의 경쟁에서 살아남아야” 한다고 판단했다. 그래서 외국인 투자 자유화 조치를 취해 외화문제를 해결함과 동시에 선진 경영 능력을 배우고 금융기관들도 선진 금융 기법을 배우도록 했다. 이런 노력이 IMF 차입금을 당초 계획보다 3년 빨리 상환하고 경제가 새롭게 도약하는 밑거름이 됐다고 김대중 대통령은 평가한다.
“나는 당시 세계가 기존의 산업사회에서 지식정보사회로 급격하게 변화하는 대전환기에 있다고 판단했습니다.”
둘째, 김대중 대통령은 지식정보화 사회가 될 것을 대비하여 “산업화는 늦었지만 지식정보화는 앞서가자”라는 메시지를 지속적으로 냈다. 1970년대부터 기존의 저가상품 대량생산으로는 더 이상 경제발전이 어렵다고 판단한 김대중 대통령은 앨빈 토플러의 『제3의 물결』 등을 읽으며 지식산업의 중요성을 간파했다. 그래서 집권 초부터 지식정보화를 국정의 주요 과제로 설정하고 정보통신 인프라 구축에 총력을 다했다. 컴퓨터 보급, 초고속정보통신망 설치, 전자정부 구축, 기술력을 가진 중소벤처기업을 지원해 정보화 사회를 이뤘다. 필요한 과학기술을 발전시키기 위해 대통령이 위원장을 맡는 국가과학기술위원회를 신설했고, 지식정보화 사회에 맞는 인재를 기르기 위해 교육정책의 목표를 바꾸고, 모든 학교에 PC를 제공하는 등 교육정보화 사업을 추진했다.
“문화적 역량은 군사력·경제력과 함께 한 국가와 민족의 흥망성쇠를 결정하는 핵심적인 요소입니다.”
셋째, 김대중 대통령이 준비했던 것은 문화·관광의 발전이다. 김대중 대통령은 세계화가 진전되고 정보통신기술이 발달하면 생산성이 높아지기 때문에 노동시간이 줄면서 여가시간에 즐길 문화·관광상품 수요가 늘어날 것이라고 예측했다. 김대중 대통령은 문화콘텐츠를 잘 개발하면 엄청난 수익으로 경제에 도움이 될 뿐만 아니라 우리나라의 문화적 역량을 키울 수 있다고 판단했다. 그런 이유로 2001년 문화 부문 예산 1조 원 시대를 열고, 예산의 상당 부분을 문화콘텐츠 분야에 배정해 문화산업 발전에 초석이 되도록 했다. 또한 스크린쿼터를 지켜내 한국영화 발전에 큰 공을 인정받아 2003년 춘사 나운규 영화제 공로상을 받은 내용도 이 책은 소개하고 있다.
“내가 주장하는 대중경제의 목적은 복지사회 실현에 있다고 밝힌 바 있습니다. 나는 오래전부터 복지와 관련된 경제정책과 사회정책에 관심을 갖고 있었어요.”
마지막으로, 오래전부터 김대중 대통령이 대비해온 것은 복지정책이었다. 1950년대 시사평론가로 활동할 때부터 관심을 갖고 있던 복지는, 1971년 대선 때부터 공약으로 나타났다. 미국 망명과 영국 유학 등을 통해 복지에 대한 서구사회의 최신 정책과 논쟁들을 알고 있었던 것도 김대중 대통령이 한국의 복지정책을 구상하는 데 큰 자산이 되었다. 집권 후 김대중 대통령은 노동 능력이 있는 사람의 자활을 돕는 ‘생산적 복지’를 지향했다. 또한 근로 능력과 상관없이 최저생계를 보장하는 국민기초생활보장제도를 실시했다. 4대 사회보험인 의료보험, 국민연금, 고용보험, 산재보험의 적용 대상과 급여 수준을 확대해 대한민국을 복지국가의 반열에 올려놓았다.
■ 연대와 통합을 실천한 첫 대통령
“우리 국민들 마음속에 있는 원한과 증오의 어두운 잔재를 없앨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김대중 대통령의 정치철학은 연대와 통합이었다. 김대중의 정치는 이념, 진영, 지역을 넘어서는 연합정치였다. 해방 직후 정치를 시작하자마자 김대중 대통령은 좌우합작 노선을 지지했다. 영구분단으로 가지 않는 것을 제일의 목표로 두고 방법을 모색했다. 3당합당으로 보수대연합이 만들어졌을 때 김대중 대통령의 신민당은 이기택·노무현 등의 민주당과 민주대연합을 이뤘다. 이때 신민당의 당세가 강했지만 김대중 대통령은 통합의 진정성을 보이기 위해 공동대표제를 채택하고 주요 당직에 민주당계 인사들을 기용하는 모습을 보였다. 또 1997년 대선 때 DJP연합을 통해 보수 진영과의 연대를 이뤄, ‘내 편 아니면 적’이라는 식의 사고에서 벗어나 시대적 과제 해결을 위한 가치연대이자 정치연대를 보여주었다.
김대중 대통령은 지역주의, 지역감정 문제 해결을 사명으로 삼고 있었다. 왜냐하면 스스로가 1971년 대선 이래 지역주의의 큰 피해자였기 때문이다. 『김대중 육성 회고록』에는 김대중 대통령이 수십 년 동안 차별받은 호남 지역이 다른 지역과 동등하게 대우받도록 노력하는 모습이 보인다. 또한 어느 지역에도 특별한 특혜를 주지 않도록 해서 지역 간 반목의 원인을 제공하지 않으려고 했다.
“이제까지 그러한 대통합의 시대를 열어본 적이 없었기 때문에 내가 그 일을 해야 한다는 사명감을 갖기도 했습니다.”
국가폭력의 피해자나 국가수호를 위한 희생자들에 대해서도 좌우 상관없이 공식적으로 포용한 정부도 김대중 정부가 최초였다. 김대중 대통령은 희생자들을 국민의 관점에서 통합했다. 제주 4·3, 민주화운동 희생자, 의문사 등에서 진상규명과 명예회복을 위한 법률을 제정하고 그 역사적 의미를 강조하는 공개 서명식을 하기도 했다. 김대중 대통령은 민주화운동 과정에서 독재 정권에 의해 혹독한 탄압을 받았다. 그러나 재임 후 박정희 대통령 기념관 건립에 국고를 지원했다. 그 이유는 김대중 대통령 자신이 “엄청난 고통을 받은 피해 당사자이기 때문에 정치보복의 악순환을 끊고 화해와 통합의 시대를 열 수 있는 가장 적임자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구조조정 과정에서 내가 가장 중요하게 강조했던 원칙은 공정이었습니다. 공정성이 흔들리고 훼손되면 정부 정책에 대한 신뢰가 흔들리고 바로 반격이 들어오면서 개혁추진이 어려워집니다.”
김대중 대통령의 통합의 정치는 국가부도 위기 상황에서 빛을 발했다. 김대중 대통령은 제15대 대통령 선거에서 승리하자마자 하루의 휴식도 없이 경제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전력을 다했다고 회고한다. 달러를 확보하고 단기외채 상환기한을 연장하기 위해서는 국제사회의 신뢰를 얻어야 했다. 그때 김대중 대통령은 한국경제 구조개혁의 비전을 제시하고 실질적으로 노사정 대타협을 추진했다. 노동계를 권위주의 정권 때처럼 압박하지 않고, 국내외적 여건을 설명하고 노동계의 숙원을 받아들이는 등 포괄적 협상에 성공했다. 또한 전 국민의 호응을 얻은 금 모으기 운동은 외채를 갚고 국제사회에 한국에 대한 긍정적인 이미지를 형성하는 데 큰 도움이 되었다. 연합의 정치는 김대중 정치 전체를 관통하는 것이었다.
“정치인은 현실 속에서 미래를 향한 진리를 구해야지 진리만 붙들고 현실을 도외시하면 안 됩니다.”
『김대중 육성 회고록』에서 김대중 대통령의 전 생애를 따라가보면 그는 “이상적 현실주의자”였다. 신념을 가지고 정치하면서도 국민들의 필요를 등한시하지 않는 책임 있는 정치인이었다. 정치가 국민의 생활과 괴리되고 정치의 생산성이 낮아지고 있는 이 시대에 김대중 대통령을 다시 소환하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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